요즘은 정체불명의 신흥심신단련 프로그램이 난무하는 시절입니다. 그 대부분이 어느 일개인 또는 몇 명이 모여 유행과 시류에 편승해 만들어 낸, 검증되지도 않았고 또한 고작 프로그램 참가자 몇 사람들에게만 자기최면적․군중심리적 효과만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 뿐 입니다.




국내 자생 프로그램 뿐 아니라 기타 국외로부터 수입된 프로그램들도 서양심리 상담사들 또는 교사나 기업 컨설턴트 등 들이 서양 심리학에 동양의 Zen(禪)사상이나 수피즘 또는 인도 사상 등 소위 오리엔탈리즘을 적당히 버무려 만든 것들로서 100년도 지나기 전에 다 사라질 것들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바탕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닌 것도 있겠으나 그 대부분이 상업주의적․지배관계적 의도를 갖고 출발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것을 만든 사람들도 돈이나 타인에 대한 지배, 존경심 획득 등에 자신의 삶의 불안함과 나약함을 해소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면 매우 약합니다. 멈춤 없이 흘러가는데다가 일회적이기 때문이죠. 바쁘고 그런대로 건강하고 좀 잘 나간다 싶을 때는 잊고 살기도 합니다.




돈이나 명예, 권력 등도 좋은 것이죠. 하지만 상황 따라 변할 수 있고 시간 따라 더불어 흘러가 버릴 수 있는, 오히려 내 삶을 더 불안하고 허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근원적인 것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근원성을 획득하는 것만이 삶의 불안감과 공허함을 제거하고 나를 진정으로 자유롭고 강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앞서 얘기한 프로그램들은 그 출발의 의도도 불순한 것들이 많지만 방법론에서도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방식의 개선(?)에만 주로 초점을 맞춥니다. 보다 빠른 효과 내지 효험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속성을 노린 것이지요.




인간의 의식에서 한 생각만 돌이키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으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 뿐이죠.




왜냐하면 결국 돌아오면 그 몸뚱이에, 여전히 주변은 그 사람들이요, 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결국 나를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겠지요.




자신은 바꾸지도 못하고 바꿀 생각도 없으면서 사람들과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해 보았자 자신의 삶의 불안감과 공허한 마음을 타인이나 세상에 전가시키는 것이요, 그에 대한 영향력을 얻고자 하는 결국 또 다른 권력관계의 추구일 뿐입니다. 자기도 자기 자신에게 속기 십상이지요. 자신의 숨겨진 욕망에 의해서 말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나 그것은 어설프게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에 깊숙이 내재한 불안감이나 공허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심지어는 타인이나 타인들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하기까지 합니다.




의식은 전체로서의 내 몸(心․身)의 한 부분입니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적 사고는 계몽주의의 시대적 역할을 이미 마쳤다고 보아야지요.

  

손쉽고 효과 빠른 수행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수행법의 효과로는 것은 고작해야 수주에서 수달 쯤 가면 속된 말로 약발이 다합니다.




인간은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깊고 섬세한 파장을 지닌 의식은 고사하고 거칠고 굵은 파장을 지닌 육체도 쉽사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태극권도 삼년이 지나서야 겨우 피부와 근육이 완전히 바뀝니다. (물론 단순한 건강적 효과는 그 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의식의 변화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돈법적 성취도 점법적 기반과 노력 위에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무엇이든 일정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공부와 공력이 요구됩니다. 양적 축적은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변증법적 발전 과정이라던데 다 같은 얘기라고 봅니다.




신체적 변화이던 정신적 변화이던 또는 단순한 기예 수준의 변화이던 변화는 쉽지 않습니다. 결단과 수고가 없다면 공상으로 그치고 맙니다. 공상은 결국 내게 무력감과 우울함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여행지에서도, 경제적 지위, 사회적 위치에서도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도 ‘나’고 어딜 가도 나는 ‘나’를 지니고 다니고 몰고 다녀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더욱 강력하지요.




‘나’는 내게 끊임없는 부담일 수도 있고 저 곳으로 건너 갈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배 일 수도 있습니다.




몽상가의 삶도 거부하지만 눈앞의 현실만 추구하며 사는 천박한 삶도 거부하고자 합니다.




상식과 통념은 편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내 삶을 질식시키고 저질 차원에만 머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경제가 삶의 전부처럼 인식되고 경쟁력만이 주요 화두가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언뜻 보면 시시해 보이는 태극권이 내게 다른 세계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에 열려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유연하면서도 강한 그런 평정의 세계 말입니다. 그런 것이 진짜 삶의 경쟁력이 아닌가요.




삶이란 정녕 ‘놀랍고도 아름다운 사건’ 일 수도 있는데,

모두들

어떠하신지요.




                    일월재 수련원장 김진백 배상




추신1 : 우린 정신적․신체적으로 너무 무겁습니다. 태극권에는 동양의 깊은 사유와 움직임이 있으나, 또한 가벼움과

           상쾌함도 있습니다.

추신2 : 본 수련원은 1991년도 서울대 교수회관 잔디마당에서 출발하여 양재동 수련원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

           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사랑을 바랍니다.